[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페이지 정보
작성일 20-10-30 23:11
본문
Download :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hwp
세종24년(1442) 정월에 한성부의 각 진제장에 수용된 기민 수는 275명이었다.
자휼전칙 이전에 태만한 관리에 대한 문책 처벌의 한 예로는 태종 15년(1415) 11월 어느 날 한 걸인이 구호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충녕대군이 구제하였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이 사실을 후일 알게 된 왕은 철저한 빈민구제사업을 하도록 명령하고, 또 이를 게을리 한 담당관리를 처벌하였다. 그 수용시설로서는 관부청사 외부에 토막을 지어 사용하게 하였다. 또 세종 19년(1437) 2월 왕은 한성판사 이숙민, 부윤 최사의, 경참군조원복, 참군 윤취 등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낭청 3인을 장(枕) 30에 처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담당관리가 보호직책을 태만히 할 경우는 엄중 문책하고 처벌하는 규정도 있었다. 이에 따르면 중앙에 있어서는 진휼청이 직접 이들을 수용 ․ 보호하고 지방에 있어서는 지방 관부가 중앙을 모방하게 하였다.
자료제목 :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에 대한 레포트 자료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굶주리고 방랑하는 걸인들을 구제하지 않아 죽게 하였기 때문이다
순서
사궁(四窮)이란 빈곤(貧困)하고 자활할 수 없는 환과고독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작성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종실록 권 24에 따르면 세종 6년(1424) 34월에 기민 수는 전국 8도 중 경기도와 전라도를 제외한 6개 도에 있어 총 9,818명으로 이는 전국적인 재해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들 기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전국 각지를 방랑하게 되고 이들 중 일부는 국도인 한성부로 모이게 된다. 이러한 규정은 이전부터 내려오던 문책 처벌 관행을 법제화하였다는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설명
reference(자료)명 :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에 대한 리포트 자료(data)입니다.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A+ assignment물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작성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료(data)title proper(제목) :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사원 승려들이 고아 또는 유기아들을 수양하여 법부와 법자의 관계를 맺어 율법(律法) 교육을 시켜 자기 후계자로 삼기도 하고 사원의 사역으로 고용하기도 하였다.
... 이하의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1723_01_.jpg](http://www.happyreport.co.kr/prev/202009/%5B%EC%A1%B0%EC%84%A0%EC%8B%9C%EB%8C%80%EC%9D%98%20%EC%82%AC%ED%9A%8C%EB%B3%B5%EC%A7%80%5D%20%EC%82%AC%EA%B6%81%EC%9D%98%20%EB%B3%B4%ED%98%B8(-1723_01_.jpg)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1723_02_.jpg](http://www.happyreport.co.kr/prev/202009/%5B%EC%A1%B0%EC%84%A0%EC%8B%9C%EB%8C%80%EC%9D%98%20%EC%82%AC%ED%9A%8C%EB%B3%B5%EC%A7%80%5D%20%EC%82%AC%EA%B6%81%EC%9D%98%20%EB%B3%B4%ED%98%B8(-1723_02_.jpg)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1723_03_.jpg](http://www.happyreport.co.kr/prev/202009/%5B%EC%A1%B0%EC%84%A0%EC%8B%9C%EB%8C%80%EC%9D%98%20%EC%82%AC%ED%9A%8C%EB%B3%B5%EC%A7%80%5D%20%EC%82%AC%EA%B6%81%EC%9D%98%20%EB%B3%B4%ED%98%B8(-1723_03_.jpg)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1723_04_.jpg](http://www.happyreport.co.kr/prev/202009/%5B%EC%A1%B0%EC%84%A0%EC%8B%9C%EB%8C%80%EC%9D%98%20%EC%82%AC%ED%9A%8C%EB%B3%B5%EC%A7%80%5D%20%EC%82%AC%EA%B6%81%EC%9D%98%20%EB%B3%B4%ED%98%B8(-1723_04_.jpg)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그러나 해를 거듭함에 따라 걸식하는 빈민 및 유기아가 점차 증가되므로 이들에 대해 무제한한 보호와 조치를 하기가 곤란하게 되자 정조 7년(1783)에 자휼전칙(字愧典則)을 제정하였다. 이 때문에 인신매매. 유아유괴 등의 병폐가 사회에 발생하게 되자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명률을 인용하여 아동 수양을 전적으로 관의 사업으
진제장이란 한성부에서 설치 ․ 운영하는 빈민을 위한 응급 구제기관으로 그 업무 내용은 기류민(寄留民)에 대한 구급 시식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수용 ․ 보호가 곤란한 유약자에 대하여서는 민간수용을 허용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이들에 대한 보호는 관의 의무로 되어 부양할 친족이나 동거할 자가 없는 이들을 일시적 또는 계속적으로 수용하여 의식을 공급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왔다.
Download :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hwp( 43 )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에 대해 간략한 요약 및 정리(arrangement)reference(자료).
레포트 > 사회과학계열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조선시대의 사회복지] 사궁의 보호(4궁보호)
다. 즉, 늙고 아내가 없는 홀아비를 환, 늙고 남편이 없는 여인을 과, 어리고 부모가 없는 자를 고, 늙고 자녀가 없는 노인을 독이라 하며 이들에 대한 보호는 삼국시대 이래로 중요한 구제사업으로 실시되어 왔다.